왜일까. 그분과의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듯 느껴지는 것은. 나는 다가서다가도 물러선다. 나의 두려움에 삼키어져 나아갈 수 없는. 그럴때면 누군가 나에게 '무엇'이 두려운지를 묻는다. 나는 언듯 그 질문에 대한 답에 근접한듯한 답변 하나를 툭 던질 뿐이지만, 두려움이 더 큰 두려움을 물고 오곤하는데, 그 순간 두려움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내 앞에서 선생노릇하는 이 앞에서 그저 잠시간 그 자리를 견뎌낼 뿐이다. 그리 단순한 답변으로 대답되는 문제는 아닐진데. 그러면서, 내가 누군가에게 선생노릇하며 아는척하고 섣불리 입을 열던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슬퍼졌다. 그 순간,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하여 나는 한단계 성장하지만 아직 그 자리에 있는 이를 보게 된다. 사실 성장한 이는 선생노릇한 이가 아닌, 앞에서 묵묵히 듣고 타인을 통해 스스로를 반추하는, 조용히 도약한 누군가가 아닐까 싶다.
우울함에 젖어 한껏 슬퍼하고 눈물흘리며 감정을 풀어내는 것에 익숙한 나에겐, 밝음은 눈이 부시고 어떨땐 불쾌한 것이 되곤 했었다. 나도 안다. 단지 그 밝음으로 나아가기 이전에 준비단계가 조금 필요할 뿐이었다. 다시 딛고 빛 가운데로 나아가기 위해선. '노력'하라는 '나는 되는데 왜 안되지?'하는 '사람들의 말'로써가 아닌,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속에서 되어지는 것임을 다시 깨닫는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종종 애증이 되곤 한다. 왜 나를 이끄시는 것일까. 잠시 내버려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교회에 나오면서 다시금 시작되는 고난들과 시선들. 마음의 내면적 갈등들. 사실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순간, 이런 고민들은 그냥 사라질 것이다. 교회에 나옴으로 생기는 여러 고민들일테니. 밝지도 않은 나를 바꾸기 위해서 일까? 왜 사서 고생을 하는가? 하는 고민들 속에서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은, 나에게 맞지 않는옷을 입히시려 부르심이 아니란 것이다. 서로의 다른 은사들로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퍼즐처럼 맞춰가고 그림이 완성되어가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이라는 걸. 억지로 밝은 사람인 척 할 필요도, 그러기 위해 억지로 해내지 않아도 괜찮았구나. 수직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수평적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어느곳도 흐르지 않으면 그것은 십자가가 아닌 막대기 신앙이 되어버릴 뿐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슬픔이 있을지언정, 사랑이 넘어섭니다. 기적을 바라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바라보던 저에게. 날마다가. 매 순간 순간이 기적임을, 예수님, 주님을 믿은 그 순간 아니 그 이전의 계획하심속에서 이미 시작된 기적임을 알게 하심에 감사해요. 슬픔의 터널 속에서 그곳에서 멈추지 않게 인도해주세요. 한껏 울고난 후에, 시작될 오늘을 다시 살아갑니다. 나가기전 잠시 웃는 연습을 해봅니다. 기쁨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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