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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T

늦은밤

늦은밤, 감성적이되어 마음의 편린들을 풀어놓았다.
잠시 SNS를 멈출까 생각했었다. 싸이월드 세대였던 나에게있어 당시의 자기 과시와 특별해지고픈 마음.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수많은 흑역사들. 시간이 지나 머리가 굵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 흑역사들이라고 생각하며 지웠던 추억이 생각났다. 그 때에만 느낄 수 있었던 풋풋한. 우여곡절 끝에 쓰여있던 그 실수들이, 미시적으로만 바라보았을 때엔 볼 수 없던 그 아름다움에 수렴하는 선을, 이후 한발짝 떨어져서 본 이후에야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볼 기회가 있었다. 화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면서, 이상하게도 그 속에서 묵상을 하게 되기도. 사실은 잘 하지는 못하지만 재미있어할 뿐인, 이제야 출발선 앞에 선 나.

잠시 멈추었던 SNS를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대나무숲이라는 통로를 그리고 몇몇 영향력있는 몇 사람의 글을 팔로우하면서 였다. 대나무 숲을 바라보자면, 자신의 잘못보다 상대의 잘못을 크게 하며 책임을 떠넘겨버리는 모습속에서 실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글 이후에, 누군가는 겸손히 빛을 발하는 이들도 있었다.

요즘 읽고 있는 책 '18년이나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후회한 12가지- 와다 이치로' 을 살짝 펴보다가 크게 울림이 있던 부분은, 신념이 있다 라는 표현. 누군가에게 신념이 있다 라는 말을 듣게 되었을때에, 그것이 신념에 대한 찬사일때도 있지만 차마 입에 담기 어려워 고집세다는 말을 완곡히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에서 나의 신념은?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조직내에서 그 조직을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그 사람의 행동이 그리 현명하지도 않을 뿐더러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부분에서 큰 공감이 되었다.

SNS속 수많은 광고와 수많은 사람(스스로를 포함한)들의 개똥철학이 난무하는 곳. 정보가 정보를 덮는 곳. 데이터마이닝의 중요성이 점차 떠오르는 곳. 그 무수히 팽창해가는 더미속에서 스며나온 빛은, 다시금 발걸음을 돌리게 하는 따스한 빛이었다. 상대에 대한 책임의 떠넘김 속에서 정죄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 상황이 거울이 되어 이전의 크고작은 스스로의 실수들. 이전의 싸이월드속 숨기고 싶었던 그 실수들 같던 그 상황이, 다른 누군가를 통하여 거울처럼 스스로가 비춰지게 되었을 때에 나 자신의 한계가 조금씩 부숴지고 지평이 넓어지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선생노릇하여 누군가를 계몽하고자 했던 스스로의 모습에서, 타인을통한 스스로의 연약함을 조금씩이나마 위로부터 공급받은 사랑으로 인해 고쳐져 감으로... 선생노릇보다 친구되기를, 말보다 살아내기를 힘쓰기를 소망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선생노릇하고자 하는 교만덩어리다.

삶에서의 복음이란 사실 별것이 아니었다. 기도란 별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청소와도 같은 것이었다. 내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의 청소란 귀찮은 것이었다. 그런데 누군가의 삶(직장)을 들어보니, 청소하는 그 순간이 기도였다고 한다. 청소란 안하려면 안할 수 있는 것인데, 반대로 하려면 할 수 있는 것이란다. 기도란 손을 마주하고 무릎꿇고 하는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는 그 모든 일 모든 순간이 기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기도의 순간 떠오른, 걸레를 빨아서 청소하던 스스로의 손의 형상을 통해 그 순간도 기도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나는 그 귀찮음을 감내하고, 작은 부분에 순종하여 청소(행동)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순간 그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바쁜 우리의 일상속 잊히시고 스스로 배경되심을 기뻐하신다는 또다른 멋진 표현을 빌리자면, 그 말에 위로받으며 그저 상황에 껴맞추어 안주할 것인지. 아니면 그러면서 바쁨속 깨어 기도할 것인지.

스스로의 생각을 풀어놓는 이 폐쇠성의 블로그 속. 솔직함과 신중함을 구분하지 못하여 종종 누군가의 눈살을 찌뿌리게 만드는 감정의 실타래. 그러나 그 실타래를 풀어가시고 아름답게 짜여져갈 것을 믿고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감성충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