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언약, 말랑말랑하고 따듯한 느낌의 ‘사랑’이라는 단어와는 동떨어져보이는 딱딱하고 차가운 느낌의 단어였다. 사실 율법 자체는 거룩한 것인데, 율법의 ‘행위’에 치중되다보니, 율법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상황과 조건 모두가 부정적으로 다가오곤 한다.
그런데 율법과 언약 그 자체를 멈추어진 시간 속 단편적 사건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기 위한 보혈의 낭비까지의 스토리를 연속성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또 다르게 보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3)
십자가의 보혈은 자칫 순간에 머물러 한정될 그 상황에대한 나의 사고를 관통하여, 언약이 ‘사랑’의 또다른 동의어로 다가오게 된다.
나의 상황들에서, 율법을 어기고 나자 찾아오는 쓰림은, 가장 은혜로워야할 에덴동산을 도망치고 벗어나야할 곳으로 변질시킨다. 하나님께서 나를 찾으시는 친밀함의 음성이, 나를 추궁하는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단절이 되어진다. 오직 십자가의 보혈만이 에덴동산을 회복시키는 새 언약되어, 이제 언약은 사랑의 동의어로써 다르게 느껴지고 다가오게 된다.
삶의 여러 자리들에서 관계들이 깨어지면서 내가 느끼는 쓰림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하나님께서 나와 단절되어 느끼실 쓰라림을 간접체험하게 된 듯 하기도 하다. 내 자녀없음의 그 고통과 슬픔이, 아이에 대한 한나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간접적으로 알게 하시는 마중물이 되었듯이 깨어진 관계들 속 그 마음을 약간이나마 알게 하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그 상황 속 도망치지 못하는 그 관계들 속, 결국 그 문제의 근본적 원인인 나의 죄성을 철저히 깨닫게 되고 애끓는 회개의 자리로 나를 부르신다. 회복의 이전에 가장먼저 나 스스로의 죄성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이 된다. 나는 사실 그리 나이스하지 않았고, 관계속 훈계가 다가올 때 나오는 타인에 대한 정죄감으로 표출되는 방어기제는, 점차 내 손에 쥐어진 날붙이들을 내려놓는 잠잠함의 시간이 되며 나의 죄로인한 결과를 타인에게 전가하여 머리속에서 벌어지는 상상속 전쟁들에서 보복성 말과 행동들이 멈추어지고 그 문제를 주님께 들고 나아가겠다는 결단을 심으신다. 직접적 관련이 없는 관계들에서도 다가오는 여러 시선들에 질려하면서 뇌피셜로 계획세워가던 보복성의 윤곽들은, 기도로 다시 허물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자기연민을 거쳐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결론들로 맺어지는 감사를 누린다. 잠잠한 것이 이리도 어려운 것이라니...!
타인에 대한 정죄감에서 벗어나, 다시금 나의 가능성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 시간 속 크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사랑을 행위를 통해 바라볼지, 존재를 통해 바라볼지 여러 상황과 조건 속에서 다뤄가십니다. 결국 주님을 선택할 때, 나를 존재 자체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인하여, 행위가 아닌 존재로써의 사랑을 선택하고 결단을 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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