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의 시기는 힘겹지만 다시금 어루만져지는 시기인 것 같다. 이제 새로운 공동체에서 새신자로 시작하게된 나에게, 그러나 공과공부시간에 나와 나눔을 해주시는 사모님께서 종종 부담스러워하시기도 한다. 이전 공동체의 목사님과 알고 계시기도 했고, 내가 신앙생활을 오래한 것, 리더로 섬겼던 것에 대해서 종종 언급하시며 'oo는 그래도 많이 들어봤을 거에요~'하고 부분부분 조심조심 언급해주신다. 사실 잘 모르지만, 이런 세심한 배려속에서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기이다.
그런데 이 시기가운데 던져주시는 통찰력 있는 질문들 하나하나에서, 나의 영적 상태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전에는 당연히 받아들이던 것에 대한 질문. 그리고 그 질문에 앞서 질문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 이 질문은 믿음에서 시작인지 아니면 나의 지적 갈증을 채우고픈(믿음으로 시작될 근간을 흔들, 반박을 위한 반박일 뿐인것인지)욕망을 욕망하는 질문인 것인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보통 첫 공과공부시간에 나누곤 한다. 으레 하던 그 질문에서, 나는 엉뚱한 답변을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닌, 내가 져야할 십자가에 대해 말하게 되고 나의 방패되는 십자가에 대해서 나누게 되었다. 사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다시한번 질문을 던지셨다. 포도나무의 떨어져나온 가지나무와 같던 나에게 있어, 십자가는 어느새 나 라는 가지에서 열매맺게 하는 포도나무가 아닌, 떨어져나온 포도나무 가지에서 외부로부터 공급없이 스스로 무언가를 피워내려 하며 말라가는 그 무언가가 되어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포도나무에 붙어있을때엔, 다른 가지들(공동체)과 결국 한 나무에 속해있다보니 서로의 가지들에 상처입기도 하고 때로는 뜨거운 해를 가려주는 순기능도 한다. 상처에 집중한 나머지 스스로 도망친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도 든다. 불가항력적 상황(실험실)에서 어쩔 수 없던 부분도 있지만 그 이유가 100%는 아니었던것 같기도.
아무튼, 떨어져나온 가지에서 무언가를 맺고자 자신의 힘을 쏟으며 말라가는 가지와 같이, 내 힘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으로 십자가를 생각했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무언가 해드려야 하는 것으로, 머리로는 알지만 어느새 다르게 행동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마치고 돌아가시는 길에서 수많은 기적들속에 제자들이 은혜에 충만하지만, 잠시 마음을 놓은 순간 역풍앞에서 두려움에 임한것같이, 나에게 있어 이전의 은혜들이 어느순간 깨어있고자 말씀과 기도에 힘쓰게되지 않는 순간 휩쓸리게 된다.
오늘 큐티 묵상중 해설을 참조하여 바라보아야 할 지향점을 적어보자면...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죽어질때(내가 죽는게 아닌 죽어질 때), 내 옆의 한 사람이 (나의 행위가 아닌)진리를 보고 거룩함 안으로 들어오는것(요한복음 17:9-19 중 17-19절 해설). 어느새 십자가의 중심을 놓쳐버린 나의 시선에 대해 사모님을 통하여 선한 방향성을 이끄시는 것 같다. 사모님께서 살림을 하신다고 종종 우스개소리로 말씀하시는데, 가정의 살림과, 청년(목사님을 도와 공동체를)을 살림(살리는)하신다고 하신다. 매주 짧은 시간, 아는 듯했던 많이 들어왔던 그 말씀가운데 더해지는 깊이와 오히려 날마다 새롭게 되는 은혜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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