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내일 실험해야하는데 잠이 안와서 끄적이는 글...
만나는 사람에 따라 나의 성격 및 역할이 달라지듯, 그러나 한때에는 누군가의 말에 귀기울여주고 때로는 경험과 비추어보되 섣부른 아는척이 되지 않도록 조심히 대화를 나누던 때가 있었다. 한번은 상담을 요청하던 한 친구의 고민을 듣게 되었는데, 내재된 그러나 터져나오는 질투심과 시기심에 스스로를 버거워하던 친구였다. 과연 어찌해야할지 조언을 그리고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상황가운데, 마침 내 상태가 좋았기 때문인지 물론 부어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흘려보내줄 수 있는 통로의 역할도 했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요즈음의 나는 어떤 상태일까? 하고 잠시 뒤척이며 생각해보니, 나에게 주어진 은사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이의 은사를 더 좋은 것으로 여겨 그것이 내것이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 누군가의 장점 그리고 웃는 얼굴은 부러움과 동시에 빼앗고 싶어지는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낮아진 자존감의 원망의 이유가 점차 나를 비추는 거울이 아닌 어떤 이유를 만들어내는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도 않을 뿐더러 혹 빼앗았다고 여기는 그 무언가를 쌓아 내가 점차 높아져 간들, 바라보는 하늘의 풍경은 과연 달라질까. 무엇을
쌓은들 하늘은 변하지 않을 텐데도 말이다. 어떤곳이던 사람이 한명 이상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게 되면, 서로에게 주어진 은사들이 다르기에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소망했고 기도했고 또한 붙잡아두었던 그 소망의 끝자락이 크신 품 안에서 통째로 들리어지는 은혜를 경험하기도. 빠른 발이 부럽다 하여 손이 발이되고자 한다면, 발에 비해 유연하고 도구를 잘 다루는 손이 부럽다하여 발이 손이 되고자 한다면 그 공동체라는 것은 온전히 설 수 있을 것인가. 손 발 몸 얼굴 등이 모여 한몸을 이룰때에야 비로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조언해주는 입장에서 어찌보면 편히 말하던 것들을 하나하나 몸소 체험하는 와중인 것 같다.
내가 건강하던 상태에서 당연시 여겨지던 것들이 아픈 상태에서는 그 한가지를 소망하는 것조차 사치로 느껴지는 어떤 상황과 조건들 앞에 서게 될 때에, 나의 내면에 숨겨져있던 연약함들이 드러나고 괜찮지 않은 괴수였던 나를 대면하게 되고, 선생노릇하던때에 괜찮음병으로 어려워하던 주의 손길을 이제는 살기위해서 부르짖는, 긍휼하심을 힘입지 않고서는 나아갈 수 없는 죄인중의 괴수인 저입니다. 저의 장점과 단점 속에서 장점으로 인해 교만치 않되 스스로를 사랑할 자존감의 회복을, 단점을 부인하지 않고 단점만을 바라봄이 아닌 그 단점으로 인해 겪게된 상황적 관계적 어려움들 속에서 나아갈 방향성과 그로인해 아픔을 겪을 나로인해 찔려 아파하는 포도나무에 달린 다른 가지나무를 향한 진심어린 사과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허락해주시기를.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해주는 기쁜 권유와 함께 시작된 중보기도는 또한 기도하면서 더욱 채워지는 사랑을 경험했다. 그러나 또한 내 마음속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중요하지 않고,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어야한다는 책임져야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었던 것은 아닐지. 잃어가던 나를 찾아가고 나를 사랑하게 되어지는 그러지 않고서는 무너져버리게 될 상황과 조건속, 역시나 자신을 사랑하게 해달라는 기도의 요청은 사랑하게되는 상황으로 마주하게 된다. 나에게 있어 예의 예절이란 종종 관계에서 더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관계의 단절을 뜻하곤 했는데, 하늘을 향해 원망을 쏟아내다보니 예의라는 족쇄에서 벗어나 조금은 아바아버지와 가까워진 것 같기도. 그 1:1의 솔직한 나눔속에서, 항상 듣기를 먼저 하던 나에게 있어 의사표현이 명확해 진 점. 그리고 이런 원망의 시기에 또한 느끼게 된 것은, 결국은 이런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점. 그 신뢰를 바탕으로 더욱 자주 원망을 쏟아낼 지언정...ㅎ
제가 되고싶어하는 형상과, 제가 닮아져야할 형상의 간극 사이즈음에서 그 갈림길 앞에서 질문을 던집니다. 이전에는 젠틀한 모습으로 예의를 차릴지언정 제 고집을 정당화할 그럴듯한 이유를 마치 벼슬처럼 늘어놓고 교양있는척 나아가다가 무너져내리곤 했는데, 요즈음은 가기싫다고 툴툴대다가도 좁은길 한복판에서 그 길을 걷는이가 적어 오히려 해방감과 자유함에 방방 뛰기도 합니다. 물론 아주 아주 짧은 순간일 뿐 나머지 대다수는 궁시렁 궁시렁 그리고 욕도 합니다... 죄송!
사람에대한 인정중독이 극을 치달아갈 즈음에, 마음의 어루만져주심과 저의 중심을 바라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시기심과질투감이 아닌, 경기에 임하는 선수의 모습이 되어지기를. 예전에 쇼미더머니라는 프로그램이었던가요? 누군가가 외국의 유명한 래퍼분께 경쟁에 대한 공정?관련 질문을 했었는데, 그 래퍼의 대답이 특히나 기억에 남습니다. 경기중에는 누구도 웃지 않는다고. 경기중에 최선을 다하고, 경기가 끝난 후에야 웃는게 아니냐고. 저는 매순간 그리고 매 상황마다 경기에대한 최선이 아닌, 웃어주지 않는 상대방을 깍아내리려 하던것은 아닐까요. 승패에 상관없이 웃을 수 있는 이유는, 경기자체가 의미가 없는것이 아닌 경기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저는 그 래퍼의 말을 저의 방식대로 맞춰 적용시키고 싶습니다. 랩실생활을 하면서 경쟁과 협력의 경계가 모호한 여러 프로젝트 과정들이 있습니다. 그 과정들 속에서 이기기 위한 상대를 상하게할 태클을 거는 것 만큼이나 그 경기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이 어디있을까요. 한 실험이 끝날때마다 그 과정가운데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그 마음을 지켜주시고, 그 경기들이 끝날때면 서로 수고했다고 악수와 위로 그리고 상대를 존중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허락해주시기를.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요즈음 저의 한계와 바닥을 마주할 수록, 저의 조그마한 질그릇은 자꾸만 깨어지고 점차 다시금 빚어가심속에 있네요. 크기가 커지기도 단단히 굳어지기도 하는 여러 과정속에서, 점차 아름다운 작품으로 빚어질 것을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또한 사회속 실망감을 안겨주는 종교인들의 모습속, 하늘의 위로를 전하는 충분한 어리석음도 허락하시기를. 나와는 관계없는 나쁜사람들 소수의 문제가 아닌, 책임감을 느끼고 기도와 행동으로 드러나게될 은혜를 흘려보낼 통로로 쓰임받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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