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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T

겸손과 사랑의 ‘목적’

[묵상나눔] 눅 4:1-13

Q. 내가 그렇게나 원하고 바라던 겸손의 진짜 목적은 무엇인가?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유대인으로, 바리새인으로 본문의 사람들은 당연히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 잔치를 거절하는 여러 핑계를 대는 모습까지. 잔치에 참여할 자격과 참석여부를 스스로의 기준으로 매기는 삶은, 잔치를 누리지 못하는 결론을 초래합니다.

본문 묵상과 함께, 겸손의 의미와 목적을 돌아봅니다. *사회적 지위(유대인, 바리새인->현대에서의 직장과 같은 기준)를 가진 사람이 겸손한 것은, 한편으로는 겸손하면 겸손할 수록 상대방을 초라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겸손을 묵상하다가, 기준이 스스로에게 있을 때 겸손조차 스스로를 꾸미는 치장품이 되는 것은 아닌가 돌아봅니다.

주님, 그래서 사랑과 겸손의 목적에 당신이 필요합니다. 나를 치장하고 상대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겸손이 아닌, 교만이라고 여겨집니다. 저의 시선과 기준을 주님께 두기를 원합니다. 겸손의 왕이신 주님으로 인하여, 저와 이웃을 ‘함께’ 살릴 통로가 될 것입니다.

스스로 겸손하기를 바라며 저의 기준과 교만은 높아져만 갈 때,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힘과 지혜를 간구합니다. 그 마음을 주장하시기를 원합니다. 끝자리에 앉아 약자와 연대하는 삶은, 크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인정이 되고 감사가 되어, 내세울 것과 자격이 없는 저를 부르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갚을 것이 있는 이들에겐 결국 무언가를 바라게 됩니다. 갚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선, 결국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a

* 질문의 맹점 : 약자는 겸손할 수 없는가? -> 이 부분은 우선적으로 ‘가능하다’하는 가정 하에, 평소 생각해보지 않았던 관점으로 접근

** 흐름의 극단성의 오류 : 돌이킬 수 없이 멀리 와버린 상황이 전제조건인 묵상이라서, 결론적으로 매일의 분투가 되어야 할 부분에 대한 부분을 덧붙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