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나눔] 눅 19:11-27
Q. 기대하고 소망하는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는? VS 나의 소망을 성취해주시는?
본문의 핵심 메시지인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과 구원, 삭개오를 찾아온 어제의 본문과 이어지는 상황은 삭개오의 집 안에서 사람들에게 또 다른 비유로 본문을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비유한 귀인은 열 므나를 종들에게 맡기고 장사하라고 하였으나, 세 번째 종은 수건에 감싸서 사용하지도 않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주인을 오해하고 뜻을 잘못 받아들입니다. 사실 본문은 열 므나를 건내줄 뿐, 결과의 ‘목표치’를 설정하진 않으셨습니다. 주님, 주인의 뜻을 곡해한 이는 다름아닌 제가 아닐까요? 이전 본문에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기위해선, 판별이 아닌 ‘나무에 오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나무의 아래에서, 재판관입니다. 그런채 여전히 므나를 수건에 둘러 여러 핑계를 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돌아보고 주님께 주파수를 맞추기를 원합니다. 저의 주파수가 예수님과 너무 달라, 보강간섭이 아닌 상쇄간섭으로 그저 사라져버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선 저의 상비약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 저의 왕이심을 입으로 고백하지만, 핑계를 대며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버림받고 심판받는 무익한 종이 되지 않도록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이 정도쯤이면 나의 나이스함이 회복되었겠지 하는 순간, 감정의 옥에 갇히고 혈기가 올라오는 상황들이 찾아옵니다. 그제서야, 이런 감정의 옥과 혈기를 잔멸시키시는 은혜의 때로 받아들여지고 찾아오심을 알게 됩니다.
여전한 삶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며, 충성된 종으로 살아내기를 원합니다. 나무에 오르기를 원합니다. 저의 유익과 감정의 다스림을 위해 주님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열 므낫이 저의 손에서도, 선한 열매들을 맺어가기를 원합니다. 억지가 아닌, 사랑이 저를 강권합니다. 열 므낫을 통해 얻은 유익을 저에게 더하시고, 열 고을의 권세를 허락받는 충성된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짠 하고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 나태와 무기력함에 휩싸이지 않고, 일상을 살아내기를 원합니다. 가장 지침이 몰려오고 마음이 어려웠던 오늘이, 오히려 열 므낫이 가장 뚜렷히 느껴지는 아이러니함 속에서 계속 질문을 던집니다.
# 기도
주님, 감정의 옥에 갇히어 핵심 메시지를 놓치는 안타까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오늘의 감정선을 주님과 담담히 풀어가기를 원합니다. 좋은 기억을 남기고, 축복하는 이로써만 남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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