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나눔] 눅 20:19-23
Q. 반론의 여지가 없는 답변이, 질문이 됩니다.
본문에서 판단형식을 빌려 질문하는 자들의 의도를 예수님께선 간파하십니다. 땅의 권위와 하늘의 권위를 대립시킨 양극성 질문이 변화되어, 본질적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지향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책잡기 위해 던지는 질문의 수준을 넘어서는 예수님의 답변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시는 듯 하기도 합니다. 답변이 오히려 질문처럼 들려집니다. ‘그 안에 사랑이 있느냐?’
최근 10년을 넘은 친구와 관계적으로 부딪히며 선과 선의 대립(스스로를 선이라 여기는 두 사람의 갈등)은 다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옳아보이는 둘 모두의 질문과 말 속에, ‘과연 사랑이 있느냐?’
정작 저는 나무에 오르지 ‘못한’삭개오로 주위를 품평하며, 전지적인 시점으로 서술하며 예수님이 아닌 상황과 스스로의 억울함을 보곤 합니다. 그 시간 그 때에, 잠시 기도로 부으심을 간구함으로, 다른 마음과 말이 흘러왔더라면? 저의 최선이 사랑에 닿아있는지(속해있는지), 저에게만 한정되어있는지를 돌아봅니다. 이런 제가 주변을, 약자를 향한다는 결심만 앞섭니다. 삶의 자리에서, 나무에 오르기를 원합니다. 나무에 오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주변의 시선을 받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시선이 향하는 곳이 예수님이기를 원합니다.
* 좋은 기회를 만났을 때
주님,
이것이 기회입니까, 위기입니까?
꿰뚫어 보는 눈을 주소서.
기회라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게 하시고,
위기라면
감추인 위험을 알아보고
단호히 거부하게 하소서.
사람들은 모두들 기회라고,
왔을 때 잡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주님,
알게 하소서. 1)
저에게 요즈음의 시기는 기회입니까, 위기입니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제 마음안에 주님을 모셨는지의 여부로 인함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저의 편으로, 타인은 저의 입맛으로 편중되게 편을 가르고 평가하는 저의 내면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사랑의 온전함은, 반론의 여지가 없이 저를 변화시키십니다. 소중함을 잃은 공허함 때문에, 그 덕분에, 다시 사랑을 질문합니다. 주님, 이것은 슬픔을 표현하는 저의 방식입니다. 슬픔에 갇히지 않고, 사랑을 구할 수 있도록 긍휼과 붙들어주심을 간구합니다. 제 힘으로는, 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ref
1) 사귐의 기도를 위한 기도선집, 김영봉, IVP(2017), p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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