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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T

사랑을 ‘어디에서’, ‘누구에게’ 찾느냐?

[묵상나눔] 눅 22:63-71

Q. 예수님을 앞에두고도, 저의 주관이 앞서지는 않습니까?

현재 상황은 베드로가 부인하고 도망 친 후, ‘제자들’이 아닌 ‘때리고 희롱하는 자들’에 의해 모욕을 당하시는 상황입니다. 제자라고 자부하던 이들은 자리에 온대간대 없고, 베드로는 부인까지 합니다. 물론 부인하고 나서도 그 발걸음을 멀리 떼어내지 못하고 주변을 배회하며 시선을 향하고 있었던 부분에서 작은 희망을 품지만, 현재는 때리고 희롱하는 자들에게만 둘러싸이신 상황입니다.

묵상을 하면서, 본질적으로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마음이 어려울 때, 대다수의 경우 제 스스로에 대한 연민에 휩쌓여서 저를 예수님께서 핍박을 당하시는 고난의 자리에 동참한 자리로, 반대로 나를 억압하는 듯한 이들을 때리고 희롱하는 자리로 롤(role)을 정해두고 상황을 마무리 짓곤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묵상을 해 나가면서, 바로 이런 태도야말로 예수님께서 장로 및 서기관들에게 답변하시는 저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런 대답은 저에게, ‘나(예수님)는 언제나 이웃사랑을 말하며 수 많은 여러 방향에서 질문을 던지고 실마리를 던져주지만, 너(본인)는 언제나 너의 생각과 주관에 따라 나를 이용하거나 본인의 입맛대로 이웃을 대적이라고 둔갑시키지 않느냐.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는 너희의 주관과 연민으로, 내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잠에 빠져있는 것은 아니냐.’하는 말씀 같습니다.

이것은 꽤나 충격입니다. 보통 위로가 필요한 상황 속에서 저의 억울함이나 상황을 설명하고 그것을 이해와 위로를 받은 상황에서 그쳐졌었는데, 감정이 요동칠 때의 저를 위로하는 그 말들에 회복함과 함께 취해야 할 ‘사랑’을 놓치는 것은 아니었는지. 수 많은 위로와 이해를 받았던 그 상황 속에서, 과연 나(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지고 듣고자 했던 시간은 과연 얼마나 있었느냐. 나(예수님)의 ‘고난’을 너(본인)의 상황의 틀에 껴맞추어 너가 받은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만 했던 것은 아니냐. 그들을 이웃의 관점으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원수의 색안경으로 바라보느냐. 너는 재판관이 되고자 하느냐, 아니면 쓰임받는 이 이자 동참하는 이가 되고자 하느냐. 언행이 불일치가 될 때에, 기도와 말씀앞에서 돌이켜져야 할 너의 태도는 무엇이냐.

그렇다면, 이런 상황이 인식이 되었고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면, 과연 너는 ‘십자가’가 보이느냐. 입이 아닌, 전심을 담은 열망이 있느냐. 그리고 그 십자가의 고난 속에, 너의 자기연민조차 감당해냈던 그 일부가 보이느냐. 나는 너를 ‘존재’로써 전부를 감당해내고 있는 것이 보이고 또한 느껴지느냐. 너희의 생각과 판단으로 증거를 요구하던 내심이, 이제는 ‘믿음’의 영역으로 돌이켜지고 또한 넘어갔느냐. 너는, ‘사랑’을 ‘어디에서’ 또한 ‘누구에게’ 찾느냐?

예수님, 저에게 없는 사랑으로 노력과 인내를 한 들 스스로를 더 괜찮은 존재라는 만족감을 우상삼고, 임계점에 다다른 순간 생색이 불같이 올라올 뿐입니다. 그러나 오랜만의 모이는 예배의 자리에서, 사람을 만나러 온 자리가 아닌 하나님을 만나러 온 예배의 자리로 간절함이 회복됨 가운데,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하십니다. 알 것 같으면 점점 더 모르겠는 그 사랑의 신비함과 이성적 논리를 함께 발맞추어 가며, 사랑을 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모일 수 없는 상황 속, 예배에 대한 열망을 부어주시며. 간절함을 회복함 가운데, 사랑의 본질을 찾아갑니다. 저의 자존심이 건드려질 때 분노가 차오르지만, 그러나 분노가 지나간 이후 분노가 일어난 그 원인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를 원합니다. 제가 우상삼던 것들이 드러나고, 고침받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분노가 온건히 쓰여야 할 때, 즉 약자의 편에 서서 대변하고 함께 분노를 내어야 할 때에 나올 수 있도록 저의 마음을 주장하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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