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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T

다른 것은, 내가 아니었다. 반전은 단 한가지였다.

모든것이 같지만 단 한가지 다른것, 그 반전이 되시는 주님.

다른 것은, 내가 아니었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 나의 마음속에 담긴 것이 정체된지 벌써 몇달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의 내 성향에 대해서 이유에 대해 따져보기 위해서 나의 성장 배경에대해서 돌이켜보니, 이러한 일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의 동네는 사실 가정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임대해주는 작은 아파트였다. 그것도 선착순과 여러 기준에 의해서 선발기준을 통과해야 그 아파트에 거주할 수 있었는데, 그 기준에 통과할 만큼이었나보다. 어머니께선 매일 출근길마다 글썽이는 우리의 눈물을 외면하지 못하시고 공무원직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셔서 우리의 삶을 선택(희생)하셨고, 집안형편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욱 더 우리의 성장과정에서 사랑과 걱정을 받고 자라났다. 어렸을때의 엄마란 예의를 중요시하시는 엄하신 분이었고, 나는 착한아이로 자라났다. 이에 대한 작은 헤프닝이라면 엄마가 모든것을 알고 있을거라는 맹신덕분인지, 하루는 초등학교에서 알림장을 안써온 날이 있었는데 엄마가 왜 알림장을 안써왔냐고 하시자 나는 '엄마가 어차피 다~알고계시잖아요?'라고 말했을 정도로 지금은 웃음이 나오는 헤프닝도 있었다. 나에게 있어 어머니의 말씀이란 지상 최우선의 선행과제였다. 그 당시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로 항상 축구를 같이 차던 친구가 한명있었다. 하지만 유아때의 화상때문에 외모로 인해서 놀림을 받던(지금으로치면 뉴스에 나올법한) 마음에 상처가 있는 친구였다. 그냥 친구로 여기고 같이 축구도 했던 그 친구와 같이 다니던 것을 보던 부모님께선, '친구를 가려 사귀었으면 좋겠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는 말씀을 하셨고, 역시나 나의 최우선의 선행과제였던 그 말을 거역하지 않았다. 물론 속으로 드는 생각으로는, 나에게 친구인데 왜 가려사귀라하시는 것일까 하는것이 이상하고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친구와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인사만 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나중에야 그것이 나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서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시고 싶은 부분의 일부였지만, 어렸을때의 맹신의 자녀는 그 행동의 결과에 순간, '아, 사람관계에서 선을 그어도 되는 관계가 있는거구나.'하는 잘못된 인식이 박혀버렸다. 그것은 나의 마음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도 아니었고, 그런 것이 생기기 이전에 모든 인간관계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굳어진 틀어진 방향성의 한 부분이었다. 부모님의 걱정 그 이상의 맹신과 그에대한 결과로써 발생한 사건이었다. 내향적이고 착한아이 증후군의 성향이 같이 뒤섞이고나니, 이제는 그 관계를 선긋는 것에서 넘어서서 그 자리(그 관계가 포함된, 소속된 단체)를 도망치고 새로운 가면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쌓아가는 것에 집중하면서 항상 새로운 자리를 갈 때마다, '아 이 자리는 떠날 곳인가, 조금 더 머물 곳인가?'를 항상 계산하고있었다. 도망하여 새로운 가면을 쓰는것과, 선을그으며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내색은 안할지언정 메기던 나에게, 공동체라는 곳에 속할 기회가 오게 되었다.

 

   그것은 이상한 경험이었다. 매주 도망가고 싶고 도망가지 않으면 내 날것 그대로의 삶이 드러날 것 같은 그 울타리, 하지만 누군가 억지로 잡아끌지는 않는 자리. 매번 울타리에 한발씩 걸치지만 결국 내 스스로의 발걸음으로 다시금 들어오게 되는곳. 그리고 타인을 저울질하고 선긋던 나에게, 나를 리더로 세우시고 나를 통해서 양육받게되는 가족이 생기게(셀)되었다. 그 순간에서야, 누군가를 평가하는 것의 무의미함과, 나에게 없지만 다른이에게 있는 은사들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 은사들 하나하나를 시기하고 부러워하기보다 어떻게하면 그 은사들이 한몸으로 잘 모여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배척이 아닌 사랑을 배웠고,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광야의 시기에는,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질투하고 평가하던만큼 나 또한 원망받을 수 있음을 나 또한 평가의 대상이었음을 누군가도 나를 미워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겸허하진 않지만 어떻게든 꾸역꾸역 받아들이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와 더불어 회개의 필요성과 회개의 기적에 대해서 묵상할 수 있었다. 내성적인 탓에 많은 오해와 다가서지 못하는 마음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스스로 아파하는 이 마음을 묵상하다보면, 다윗왕을 향해 날아오던 사울왕 군대의 창날과같이 나는 얼마나 많은 창날들을 타인에게 던졌던지를 묵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창날의 손잡이까지 잡을 지언정, 던지지 않을 수 있는 비법인 회개에 대해서 더 나아가 그 창날을 피하기만 하는 것과, 돌이킴의 중요성에 대해서 묵상하게 된다. 회개의 기적, 그 반전의 시작에 대해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그와 더불어, 내 마음과 상황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게된 이 순간이 바로 주께서 일하시기에 가장 적절한 때임을 고백하는 기도가 터져나왔다. 주님, 제가 던진 창날에 아파했을 이들의 마음의 반의 반이라도 제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제 작은 아픔은 고작 그정도 뿐이었을까요? 저는 다른 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저 또한 시기질투미움원망 무시배척의 감정으로 가득차있고, 불안함속에 있습니다. 저라는 사람이 다른것이 아닐 것입니다. 단 한가지 반전이 있다면, 이러한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포기치 않으시는 주님이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의 모든 삶의 반전이 되시니, 그 반전을 힘입어 한걸음씩 걸어나아가길 원합니다. 저에게 던져지는 창날들에, 내가 더 아프다고 울부짖으며 창날을 던질 누군가를 찾아다니던 저를 돌이키시고 다만 그 손을 거두어주시기를. 누군가에게 던지는 것이 분노의 창날이 아닌, 인정함과 사랑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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