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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T

사랑'받는'자, 성품을 '입는'자

[골로새서 3:12-4:1 ]


요즈음의 나 라는 사람은 겨우 붙들고 있던 자존감이 무너진 시기를 지나고 있다. 스스로의 괜찮지 않음을 너무나 철저하게 바라보게 되는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낱낱이 드러나는 날것그대로의 내면은, 때로는 누군가를 불편하거나 상처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내면이란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어서,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으로 무너져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나 스스로의 힘이 빠지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나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한계를 철저하게 느끼는 와중이다. 기도를 열심히 할 때엔 그 '순간'만 잠시 열정으로 뜨거워지고 무언가 신앙적으로 성숙해진 것 같기도 했었다. 찬양을 할 때엔 목이 쉬어야, 손을 들고 눈물을 흘려야 오늘의 예배가 은혜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신앙과 믿음이 무엇으로 인한 것이 되는 것일까? 신앙과 믿음이 말씀으로 인함이어야 한다는 부분에서, 나의 경험적 한계와 지식으로 포장하였던 그 내면의 허무함이 가득 채워지기를. 

  특히나 오늘의 말씀이 참으로 위로가 되었다.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우리는 우선,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이다. 사랑을 받음으로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그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었다. 종종 내 스스로의 한계와 부딫히고 나의 내면을 낱낱히 드러내게 되는 그 순간 드는 생각이란 나를 알게 되어서 너무 기쁘다 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정도밖에 안되는 사람이었던가 하고 탄식하게 되면서 무너지고 주저앉는 반복이 제자리에서만 일어서고 무너짐의 반복만을 일삼던 사람이었다. 문제를 바라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를 바라보면, 한숨이 나온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문제가 아닌, 문제를 해결하실 이를 바라보아야 한다. 스스로의 한계에 매이게 되면 엉키어져 풀어낼 수 없는 실 뭉텅이로 그저 주저앉을 뿐이다. 나의 문제란 내가 매어져야할 것이 아닌 내가 풀어져야할 것이다. 내가 진정 매어져야 할 곳은 문제를 해결하실 이, 주님이시다. 이런 나의 한계속에서 사랑이 흘러나올 수 있는 까닭은 사랑을 받고,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을 옷입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성품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인정되고, 이러한 성품을 입게 됨으로써 '되어지는'것이다. 


  요즈음 제가 특히나 무너져있다고 여긴 부분은, 스스로의 변화를 포기한 부분입니다. 도망할 수 없는 이 자리에서, 그리고 특히나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여기던 그 자리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흘려보내는 쓰임받는 이로써의 기도를 포기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부분은, 사랑을 하는 자가 아닌 사랑을 받는자라는 것을 우선 알게 하시고 사랑의 주체를 다시금 알게 하십니다. 이상하게도 이 말씀은 모태신앙이었던 저에게 있어서 항상 들어왔던 익숙한 말씀이었고 뇌리에 박혀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일부라도 알게 되는 것은, 한나의 기도와 같이 제가 감당할만큼의 시련속에서야 그 말씀이 체화되는 것 같습니다. 말씀으로 살아내는것이란 이렇게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우선은 그 자리를 도망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하겠습니다. 저의 한계가 인정되고, 바로 그렇기에 그 자리에서 전할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복음이란 이미 주어지고 값을 매길 수 없는 선물인데도, 저는 왜이렇게 그 복음을 포장하려고 한 것일까요. 포장하려하면 할수록 그 본질은 왜곡되어지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 너무 늦지는 않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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